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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감]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lawbotkim 2021. 1. 5. 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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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론

처음에 수업계획서에 과제로 두 권의 책을 소개 받았을 때, 눈에 띄는 책 한권이 있었다. 당연히 앞으로 쓰고자 하는 책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한나 아렌트저) , 눈에 띈 이유는 국제법 수강을 하면서 아르헨티나와 이스라엘 간에 국가관할권에 관한 국제법 판례가 있었는데 이를 통상 아이히만 판결이라고 불렀기 때문이었다.

왠지 모를 친숙함으로 이 책을 선정하게 되었고, 이를 통해 한나 아렌트의 시점에서 바라 본 아돌프 아이히만이라는 인물과 그를 통해 현실에서의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는지에 대해서 차례대로 서술하도록 하겠다.

 

. 책 소개

 

1. 한나 아렌트의 정치철학

한나 아렌트의 저서를 번역한 책에서는 책의 이해를 돕기 위해 정화열 정치학 교수가 한나 아렌트의 정치철학에 대해 쓴 글을 먼저 소개하고 있다.

기본적으로 한나 아렌트는 하이데거 철학의 변용이라고 할 수 있는데, 한나 아렌트의 입장에서는 인간은 '두 번' 태어난다:한번은 생물학적인 탄생이고, 두번째는 사회적인 탄생이다. 특히 한나 아렌트는 두번째, 인간의 실존을 증명하고 그 실존의 조건이 되는 외부 세계의 존재, 즉 인간의 복수성을 인간의 본질이라 규정하고 있는데, 인간이 타자에 대해서 '행위 가능성'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한나 아렌트의 정치철학의 본질이자 기본 모티브라 할 수 있다. 이런 측면에서 한나 아렌트는 실존의 표지를 '죽음'이라 보았던 하이데거 보다는 하이데거 철학의 비판적인 변용인 레비나스에 가깝다고 할 수 있는데, 양존재의 대등한 관계 정립이 불가능한 점과 타존재에 매몰되어 봉사한다는 레비나스 특유의 윤리학은 타자의 존재를 중요시여기는 한나 아렌트의 정치철학 및 윤리학과 많은 접점이 있다고 할 수 있다.

 

2. 책 내용의 중심에 선 인물, ‘아돌프 아이히만

기본적으로 책의 내용은 예루살렘에서 이루어진 아이히만의 공판에 참여한 한나 아렌트가 바라 본 아이히만의 태도와 법정의 모습을 담고 있다. 아이히만에 대한 한나 아렌트의 극단적인 표현을 빌리자면, '그는 자신의 죽음에까지 말장난을 하다 죽은' 속물 중의 속물이었다는 것이다.

아이히만의 공판의 주 내용은 아이히만이 얼마나 괴물이었는지에 초점이 맞춰진 경향이 있는데, 그것은 이스라엘의 정치적인 노림수가 다분히 섞여 있는 재판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히만을 나치즘의 괴물로 만들려는 시도에도 불구하고, 아이히만이 법정에서 보여준 인물성은 지극히 정상(심지어 정신과 의사까지 불러와서 검진했음에도 불구하고)이었다. 오히려, 그는 출세에 눈이 먼 인물이었다. 아돌프 히틀러에 대해서 '하사관에서 총통까지 올라온 8000만 독일 국민의 자랑스러운 모범'이라고 기술하거나, 자신도 '좋은' 유대인들을 알고 있었다고 이야기하는 등등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이러한 그의 화술에는 결정적으로 '타인에 대한 공감 능력이 떨어진다고 할 수 있었다' 공판장에서조차 그는 자신의 업적에 대해서 떠벌리기를 좋아했는데, 유대인 제거의 프로세스(추방->수용->학살)의 각 단계에 있어서 자신의 공적을 끝없이 이야기하고, 실행 불가능했던 계획들이 이루어지지 않은 점을 지속적으로 아쉬워하며, 유대인 말살의 과정에서 유대인의 운명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유대인에 대한 공감은 전혀 없이 자신은 '좋은' 유대인을 알고 있다는 이야기를 반복적으로 뱉어낸다. 심지어는 자신의 죽음의 순간에서도 자신의 죽음에 대한 미사여구를 늘어놓으면서 자신의 죽음이 갖는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는 모습까지 보였다.

 

3. 나치의 유대인 학살 프로세스 추방수용학살

홀로코스트라는 유대인의 제거가 독일 사회로부터 유대인을 '타자화'라는 복잡한 과정을 통해서 진행됨을 이 저서는 보여준다. 유럽 사회 전반에 깔려있는 반유대주의를 나치가 적극적으로 사용한 것도 있지만, 그 반유대주의를 나치는 국가단위에서 효율적으로 처리하였기 때문에 인종 청소, 학살의 대명사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악랄한 '업적'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행위는 상당히 '복잡한' 과정을 거치는데 처음에는 유대인을 '추방'하다가, 그 뒤에는 그들을 한군데 '수용'한 뒤에, 악명높은 반제 회의을 통해 등장한 '최종적 해결책''학살'까지 상당히 머나먼 길을 돌아서 온 경향이 있다. 하지만 이들의 본질은 유대인을 독일사회로부터 분리하는 타자화의 과정이었다는 점이다. 그 와중에 의외로 존재한 유대인 시오니스트들과 나치의 '협력'(추방-수용의 프로세스에서만)이다. 물론 이들의 '협력'은 나치의 유대인 타자화에 있어서 큰 조류로 부각되지는 못했지만, 이러한 '타자화'에 있어서 소수의 유대인들이 이득을 보려한 점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시오니스트, 아이히만의 표현을 빌리자면 유대인들이 서있을 땅을 찾아다니던 이들은 유대인들만의 국가를 만들고자 노력했고, 이를 위해서 나치와 국가설립을 위한 논의를 하기도 했다. 물론 그들은 그것이 유럽 전 사회로부터 타자화를 당하는 과정이었음을 인지하지 못했다.

 

. 느낀 점 및 사견

 

1. 자신의 행동에 대한 판단결여의 위험성

 

(1) 나치독일시대의 유대인 학살을 주도한 장교 '아돌프 아이히만'은 수많은 유대인들을 잔인하게 죽여 성격파탄자라는 인식이 강했으나, 실제로 법정에서 보여 준 아이히만의 평소 모습이 근면하고 성실한 인물이었다. 저자 또한 이에 주목하며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하고 있다. 아이히만에게 있어 유대인 제거과정은 그저 그가 담당하게 된 '업무'의 일환이었을 뿐이었는데, 이를 성실히 수행한 것이 범죄로 치환되어 비난을 받게 된 것이다. 실제 아이히만은 이에 대해 상당한 불만을 가졌다고 한다.

아이히만이 자신에게 주어진 업무를 성실하게 수행했음에도 후에 이렇게 비난을 받게 된 것은 그가 자신의 행동이었던 유대인 학살의 정당성에 대해 생각하지 않은 것에서 유래한 것이다.

 

(2) 이런 아이히만의 태도와 유사한 사례는 우리나라의 역사에서도 비교적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근현대에 있어서 오랫동안 군사독재 시기를 경험한 우리나라에서도 군사정권의 민주주의 탄압이라는 부당한 명령을 받고도 경찰과 군인들은 이에 대한 정당성의 판단을 하지 않고 자신의 업무처럼 행하였고,(일부는 이 것이 부당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로 인해 많은 무고한 시민들이 고문을 당해 중상을 입거나 목숨을 잃었다. 군사독재가 끝난 후, 법정에 선 이들의 공통된 주장은 거부할 수 없는 명령에 복종했을 뿐이었다.’라는 것이었다.

(3) 자신의 행동에 대한 정당성의 판단을 포기한다고 하여, 부당한 자신의 행위가 정당화될 수 없다는 것은 아이히만을 통해 충분히 알 수 있다.

 

2. 생각하지 않는 것의 위험

 

(1) 사실, 전술한 자신의 행동에 대한 판단결여의 위험성보다 현실에 있어 더 무서운 것이 있다. 바로 생각하지 않는 것의 위험인데, 아이히만 역시, 유대인 학살이라는 자신의 행동에 대해 생각하는 것을 그만둠으로써, 반성의 기회가 오기는 커녕, 자신이 악한 존재라는 것을 인식조차 못하였다.

 

(2) 여기서 내가 느낀 점은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 또한 제2의 아이히만이 될 수 있다는 점이다. 현대 사회에서는 유대인 학살과 같은 행동이 인륜에 반한다는 점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무의식적으로 인식하고 있을 정도로 인권이 발달하여, 행동에 의한 비난의 가능성은 사실상 적은 것이 사실이지만, '생각하지 않는 것의 위험성'의 발생가능성은 상당하다고 볼수 있다. 우리사회의 일부 사람들은 정치, 경제 생활을 하면서 자신에게 피해가 가지 않으면 '나만 아니면 된다'는 마음가짐으로 문제를 회피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일부 세력이 언론을 장악하여 매일 그들에게 유리한 내용의 보도만을 행하게 된다면, 우리는 문제에 대한 관심도가 줄어들게 될 것이고, 설사 관심을 가진다고 해도 언론이 이끄는 생각의 흐름대로 따라가게 되어 부당함에 저항하는 사람들에게 오히려 손가락질을 하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을 것이다.

 

(3) 2014416일에 발생한 세월호 참사는 이러한 우리의 모습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라고 생각한다. 제일 먼저 탈출한 선장에 대해서는 모두가 입을 모아 비난의 화살을 날리면서도 구조작업에 있어 무능한 모습을 보이는 정부에 대해서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와 현장에 있는 자들의 소리는 외면한 채, 언론보도만의 정보에 의지하여 정부에 대한 비난에 소극적인, 아니 오히려 비난하는 자들에게 역정을 내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양 쪽의 정보를 다 듣고 어느 것이 더 타당성이 있는지, 믿을 만한 것인지를 판단하지 않고 인지도 있는 쪽의 정보만을 진실이라고 믿으며 자신의 주장을 해 나가고 있는 모습은 예루살렘의 법정에 섰던 아이히만과 차이가 있다고 할수 있을까?

 

(4) 한나 아렌트의 주장을 듣고 있다 보면 현재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용산참사때 부당하게 집행되는 공권력이 생명을 앗아갈때 그 부당함에 '생각없이' 있었고, 쌍용차 사태때 부당하게 집행되는 공권력의 결과로 수많은 사람들이 자살을 하고 죽어갈때에도 그 부당함에 '생각없이' 있었다.

부정한 권력이 그 권력을 부당하게 강요할때 우리의 경찰은 어느 누구도 저항하지 않고 따랐으며, 국민들은 구성원들의 죽음 앞에 내 일이 아니라고 눈을 감았다.

악덕한 자본과 권력이 비정규직을 양산하고 수많은 금권과 연계된 부정이 생기고, 사회가 부정과 비리의 썩은내로 홍수를 이루어 갈 때조차 우리는 이 냄새안에서 같이 뒹굴며, 하루하루 '생각없이' 세상은 다 그런거 아니냐며 동조하며 살아왔다.

 

 

. 결론

정당하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에 대해 침묵하고 판단을 거부하는 것은 오히려 더 위험한 악에 해당하는 것이 된다. 아무런 행동없이 사회의 톱니바퀴처럼 평범하게 살아간다고 해도 생각하기를 중단하는 순간, 우리는 선함을 잃어버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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